[박준수 칼럼]80년 오월, ‘소년투사’ 종철 군의 죽음

등록일자 2023-05-16 15:29:17
▲망월동 묘지

오월이 오면,
우리는 말없이 무등산을 바라본다
벌써 아득한 세월 저편
산 아래 금남로에는 가로수마다 연등이 걸리고
부처님 닮은 어머니의 얼굴에 봄빛이 곱게 물들었다
생명이 움트는 광주천 여울을 따라
푸르른 물안개는 도시를 포근히 감싸는데,
갑자기 몰아친 날 선 광풍이
금남로 거리를 순식간에 핏빛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 날 천인공노할 날벼락으로
해맑은 10대 소년 종철*군은 싸늘한 죽음이 되었고
수많은 여린 목숨들이 총부리에 쫒겨다니다 꽃잎처럼 나뒹굴었다
그로부터 마흔 세 번째 오월이 찾아왔다
우리들 가슴 마다에 멍울진 그리운 얼굴들
오월이 오면,
우리는 말 없이 그들의 이름을 되뇌어 본다
그리고 스스로 무등산이 되어 그들의 영혼을 품에 안는다
그들의 피와 살을 껴안고 서석대, 입석대로 일어선다
이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오월, 그 누가 푸르지 않으랴.
-시 ‘오월, 그 누가 푸르지 않으랴’ 전문-

이 시는 80년 5월 계엄군 총격으로 사망한 고 김종철(당시 만 17세)군을 추모하며 필자가 쓴 글입니다.


◇집안 가난해 초등학교 졸업 후 자개공장에서 일해

1980년 이후 해마다 5월이 되면 후배 김종철 군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그는 고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였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양동시장 근처 자개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은 당시 광주고속(현재 금호고속) 정비공장 인근에 위치한 허름한 판자집으로 지금 양동 금호아파트 정문쯤에 있었습니다.

부모는 일용직 근로자들을 상대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는 무허가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었고요.

새까만 피부에 광대뼈와 치아가 약간 튀어나온 얼굴에 늘 웃음이 가득했던 천진난만한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다니던 자개공장에는 비슷한 또래의 소년소녀 노동자들이 대여섯 명 있었는데, 퇴근 후에는 양동시장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곤 했답니다.

장난기와 유머가 많은 평범한 그가 어찌된 일인지 80년 5·18 때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 진압 장면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공수부대가 광주에 진입하자 금남로에 나가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5월 27일까지 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의 총격에 의해 숨을 거두었다고 하고요.

그의 죽음은 가족들에게 큰 슬픔으로 다가왔고 그 충격으로 인해 그의 동생마저 정신병을 앓다가 자살하는 등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머니는 북구 양산동에서 주점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5·18 피해자 가족들은 신군부 집권기간 내내 ‘폭도’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가야 했으며, 트라우마로 인해 2차, 3차 피해를 겪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김종철은 학생 신분이 아닌 공장 노동자여서 사회적으로 주목받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국립 5·18민주묘지 홈페이지에도 그의 직업은 ‘무직’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어느 기록에는 자개공으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제대로 신원확인이 되지 않은 탓으로 보입니다.

그가 만일 생존해 있었다면 올해 만 60세로 회갑을 맞습니다.

그러나 그는 망월동 언덕 푸른 잔디 아래 외롭게 누워 있지요.

국가폭력으로 희생된 그의 짧은 생애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미완의 역사..5·18 정신 헌법 전문에 수록해야

5·18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김종철 군처럼 평범한 소년이 어떻게 목숨을 걸고 항쟁 현장에 뛰어들게 되었는지를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실규명은 발포 책임자와 같은 거대 담론과 함께 개인사적인 미시적 접근이 동시에 이뤄져야 완벽하게 진실 앞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자는 논의가 점차 무르익어 가고 있습니다.

그간 일부 보수진영에서는 5·18를 두고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이다’고 하는가 하면,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돌출되기도 했지만 점차 잦아들면서 헌법 전문에 수록하자는 쪽으로 여론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5·18이 일어난 지 어느덧 43년, 신군부의 집권야욕이 빚은 유혈사태지만 아직도 진실은 드러나지 않고 희생자들은 여전히 명예가 회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월 영령들의 피의 대가로 민주주의가 이룩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했지만 역사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망월동 추모관에 앳된 종철군의 영정사진을 보면서 그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빌어봅니다. 언젠가 역사가 진실을 밝혀주기를 고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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