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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커멘트 】
5*18의 참상이 전세계로 알려지게 된 데는 해외 동포와 유학생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식투쟁에 나서고 가두 시위를 벌이는 등 고립된 광주와 연대에 나섰던 당시 활동들이 증언과 자료를 통해 공개됐습니다. 김재현 기자의 보돕니다.
【 기자 】
(집회 초청장 내용)
지금 이 순간에도 조국에서는 수 없는 부모, 형제들이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2일 독일 제1공영방송을 통해 광주의 참상이 처음 해외에 공개됐습니다.
수십 명의 유학생들은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베를린 도심에서는 5백 명의 동포들이 가두시위를 벌였습니다.
▶ 싱크 : 위상복 / 전남대 명예교수
- "텔레비전을 트니까 금남로가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 뒷날 유학생들 모여서 단식 투쟁이 좋겠다."
반정부 시위는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보훔과 본, 쾰른 등 독일 전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 싱크 : 신상전 / 전 덕성여대 총장
- "여러가지 사정으로 봐서 국내(한국)에서는 광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기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료를 먼저 접할 수 있는 우리가 이 일을 하자 이렇게 해서 보고서를 저희들이 만들기로.."
광주와의 연대를 호소하는 외침은 미국과 일본 등에서도 이어졌습니다.
80년 6월 1일 호남향우회 주최로 추모식이 진행됐던 LA에서는 일주일 뒤 천여 명의 동포들이 모여 궐기대회를 열었고 LA타임스와 ABC, CBS 등 미국 언론이 이를 보도했습니다.
일본 언론을 통해 광주의 실상을 접한 재일교포들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한국 정부에 대한 규탄행동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려나갔습니다.
해외동포들에 의해 기록된 80년 5월 광주의 역사는 자칫 묻힐 뻔했던 5.18의 진실을 알리는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는 평갑니다.
kbc 김재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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