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비씨] "80년 5월 21일의 진실"

등록일자 2019-03-22 15:15:26

5·18 당시 50여 명이라는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피의 수요일! 5월 21일!
그날의 진실을 파헤쳐봤습니다.
#발포명령자_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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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18 당시 50여 명이라는 최대의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수요일! 521! 그날의 가짜뉴스를 반박해 보겠습니다

 

- 영화 <화려한 휴가> -

 

“1시 정각이었다. (도청 옥상 스피커를 통해) 애국가가 장중하게 울려퍼졌다.

그 애국가에 맞춘 듯 따따따 따따따 요란한 총성이 일제히 터졌다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증언 -

 

시위대가 나오면 공수부대원들이 조준사격을 했다.

부상자 등을 부축하기 위해 나오던 시위대에게도 사격을 가했다

- 2007년 국방부 5·18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 중 -

 

“13:30분 경 태극기를 든 청년이 상체를 내민 채

도청 쪽으로 돌진해 오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 2007년 국방부 5·18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 중 -

(해당 사진은 1987년 6월 26일 한국일보 고명진 사진기자가 촬영한 것으로,

5·18민주화운동과는 관련이 없음을 알립니다)

 

너무나 비극적인 역사의 한 장면인데요

시민을 향해 집단 발포를 명령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4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 씨가 유력한 책임자로 추정될 뿐인데요

 

최근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이 나왔습니다

21일 집단 발포 직전, 전 씨가 광주에 있었다는 건데요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전두환 씨가 헬기로 서울로 돌아간 이후 바로 광주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 사살행위가 이뤄졌습니다

미군 501여단 방첩 정보요원 김용장씨 JTBC 인터뷰 중 -

 

하지만, 전두환 씨는 예나 지금이나

발포 명령에 대해 완강히 부인하고 있습니다

 

자위권의 발동은 최악 상황에서만 현지 지휘관의 사태 판단에 따라

- 전두환(국회 청문회, 198912) -

 

자위권 발동 차원에서 현장 지휘관이 판단했다는 겁니다

 

, 자신은 당시 지휘 계통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항변합니다

 

군대라는 건 지휘 계통에 의해 딱 움직이는 거요. 나는 계엄사령관 부하요. (지휘 체계 이원화는) 군에 대해서 전혀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

- 전두환 (20032월 인터뷰) -

 

전 씨는 지난 11일 광주법원에 나와선 짜증 섞인 반응만 보였습니다

“(발포 명령 부인합니까?) 왜 이래

 

과연 사실일까요?

먼저 5·18 당시 군 지휘 계통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

2군 사령관진종채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

31사단장 정웅

그 밑에 7, 11, 3공수여단장 순입니다

 

그런데 5·18 그 급박했던 상황에서

군의 지휘체계가 무너지는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집니다

 

먼저 정웅 31사단장은

 

이미 20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는 내 작전 통제권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3공수여단이 내(무혈진압) 지시를 무시하고 유혈 진압을 했고

공수여단장을 소집했는데 모두 전교사로 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함께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 5·18 사건 24차 공판(88년 국회 청문회) -

 

게다가

 

“203공수여단의 발포는 31사단과 전교사에 보고되지 않았고,

그 결과도 민간인 2명 사망, 5명 부상이라고 했는데

폭도의 공격에 의한 자체 피해라고 왜곡돼 있습니다.

- 2007년 국방부 5·18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 중 -

 

그럼에도 “3공수 여단의 상급부대였던 전교사나 31사단에선

발포 경위 등을 파악하려는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마치 사건을 뒷수습하듯이 2군 사령부에서는 발포가 이뤄진 후인

52022:30분이 돼서야 발포 금지, 실탄 통제, 특전사 부대 임무 20사에 인계(교대)검토등을 지시합니다.

- 2007년 국방부 5·18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 중 -

 

설령 상황이 나빴다 해도 발포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문제였습니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20일 밤 자정께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공수단의 철수를 건의, 승인을 받아놓은 상태로 발포까지 해가며 시위를 막을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었다라고 증언합니다.

-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88128일 국회 제17차 청문회) -

 

5·18 보다 한 달여 전에 일어난 사북사건의 경우 11공수여단을 항공과 육상으로 투입하면서도 총기사용은 긴급시라도 총장 승인 후라고 돼 있습니다

유독 광주에서만 총장의 승인 없이 520일 밤

3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 61, 62대대에 실탄이 지급됐고

21일 오전엔 11공수여단 63대대까지 실탄이 분배됐습니다.

- 2007년 국방부 5·18 진상조사 결과 보고서 중 -

 

한 가지 특이한 게 정호용의 지휘를 받는 공수여단이 아닌 다른 부대에서는 발포 명령이 상당히 절제됐다는 점입니다

 

21일 오전 9시 시위대 1,000여 명이 교도소로 접근할 때도 전교사령관은 발포 명령을 금지시켰습니다

 

같은 날 오후 6, 31사단장은 어떤 경우라도 허가 없이 발포하지 말고 탄약 장전도 금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같은 지휘 라인에 있는데 공수여단만 유독 대응이 달랐던 겁니다

 

지휘 계통이 이원화됐다는 주장이 여기서 비롯된 겁니다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있습니다

지휘 계통에 없다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21일 오전 자위권 발동을 결정한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그 뿐 아니라 5·18과 관련된 각종 사항을 결정하는데 전두환, 노태우 등이 회의에 참석했다는 문서가 속속 밝혀지고 있는데요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 광주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 씨는 2018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이른바 작전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현지 보안부대에서 현미경처럼 보고하면 보안사령부에서 광주와 관련된 주요 결정이 이뤄졌다라고 말했습니다.

 

505보안부대에서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에게 보고하면

보안사령관이 주요 결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한편, 고 조비오 신부는 21일 오후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사람이 그 위에서 내려다 보는게 보여

그 헬리콥터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정도 높이에서 이렇게 스윽 가면서 드르르르 쏘는 거라...”

- 조비오 신부 / 5·18 당시 수습위원 -

 

이에 전두환 씨는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며 맹비난했고 현재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재판부가 헬기 사격을 인정되는 순간 현장 지휘관의 자위권 발동이었다는 신군부의 논리는 무너지게 됩니다

 

(인터뷰) 김정호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장

헬기 사격이라는 것은 전쟁 시에 적군을 향해서 하는 적대행위 중에 가장 강력한 공격행위이기 때문에 과연 헬기 사격을 했다고 인정이 된다면 그 자체가 자위권 발동의 모든 원리가 허물어진다고 생각되기 때문데

 

(인터뷰) 이재의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그 시위대들이 너무 숫자가 많아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발포를 했다

그러면 헬기에도 그런 위기가 있었는가, 그런 위기 상황은 아니었을 거란 말이죠

 

하지만 발포 명령자를 밝힐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신군부는 발포 명령에 대한 문서를 철저히 감췄습니다

4.19 혁명 당시 발포 명령자의 최후를 아주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4.19 당시 최인규 발포 명령자는 사형 당함

- KTV 뉴스 중 -

 

반면 안병하 도경 국장은 4.19 혁명을 교훈삼아 발포 명령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인터뷰) 이재의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특히 안병하 국장 같은 경우엔 정말로 발포를 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자기 마음에 새겼기 때문에 자기가 희생당하고 말지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고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희생한 안병하 국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 일당은 여전히 당당합니다

 

“(지시는 계엄사령관이 하셨단 말씀이신가요) 그럼요 다 계엄사령관이 했지 전두환이가 뭐 할 게 있어요 보안사령관이 그런 명령을 내릴 수도 없고 내려도 듣지도 않아요

- 정호용 JTBC 인터뷰 중 -

 

사격한 사실도 없는 걸 가지고 지금 이런 식으로 재판하는 게 납득이 안 되네요

- 허화평 JTBC 인터뷰 중 -

 

이런 불의의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5·18진상규명위원회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통해 어떻게 불법적인 지휘 체계를 작동시켰는지 밝혀야 합니다

 

그 가운데 발포 명령자도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터뷰) 김정호 /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장

정부가 발표한 국가 공인의 진상결과 보고서가 책자 형태로 만들어진다면 하나의 사안마다 팩트체크할 필요가 없고 그것(책자)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여야합의안이 법에 의해서 조속히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출범했으면 좋겠는데 지금 법 시행은 (지난해)913일인데 아직 6개월이 됐는데도 저렇게 지연되고 있어서(안타깝습니다)”

 

광주 시민들은 정말 폭도였을까요?

계엄군 투입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요?

 

혹시 권력 획득과 정적 제거를 위해

사전 기획된 일은 아니었을까요?

 

다음 시간에 그 진실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끝까지 함께 해 주십시오

 

[kbc광주방송 스마트미디어센터]

기획·구성 김태관 / 출연 정의진 / 편집 전준상 / 그래픽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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